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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경화(안나)님.

네슈라 2006. 10. 15. 10:30



▲ 참 소중한 당신 10월호 책 표지



▲ 기사 속 사진


사람 냄새 나는 오지  여행

화분들이 늘어진 발코니 사이로 햇살이 가득 드는 거실에 우리의 이웃,그러나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은 황경화 (안나)자매를 만났다. 유럽,일본등지를 여행하면서 멋진 것은
많은데 뭔가 부족하단 생각이 들던 차에 우연히 캄보디아에 갔다가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게 좋았다는 그녀. 그 뒤로 몽골, 바이칼, 인도등 가난하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나라들을 다니게 되었다고. 네팔에서 트레킹을 할 때, 농기구에 다쳐 상처 난

사람들이 치료도 못 받고 약도 못 써 아주 비참해 보였는데도 눈이 맑고 얼굴이 너무

환해 감동을 받았단다.

"문명의 발달이 반드시 행복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그들과 비록
의사 소통은 안 되었지만 감정 교류를 느껴 더 다니게 된 것 같아요." 그런 겸험들 때문일까? 

화려하고 편환 여행보다는 산타고 길 걷는 게 더 좋단다.

왜 걷느냐고요?

"왜 걷느냐고요? 그냥. 그냥 걷고 싶어 걸어요."
학교에 사표 낼 때가 방학 때여서 동료 교사들과 놀러 다녀 그땐 허전한 것을 몰랐는데,
막상 개학을 하게되자 혼자만 집에 있는 것 같아 소외감이 들고 우울해져 운동 삼아
등산을 했다. 매일 새벽 4시 반에 집을 나서서  만월산 능선과 숲길을 걸어 집에 오면
7시 반 정도 되었는데, 폭우가 내리고 벼락이 쳐서 환청까지 들리는 무서운 날에도
묵주 기도를 하며 다녔다.
그래서 산에 다니는 이들 사이에서 독하다고 "빨치산"이란 별명도 얻었다고. 걷다 보니
자연의 소중함을 알게돼 풀 한 포기 나뭇잎새 하나 함부로 꺾지 않는단다.
언제까지 걸을 거냐는 질문에 살아 움직일 수 있는 동안은 어디를 걸어도 걸을 거란다.

"한비야씨 책을 읽고 국토 종단할 생각이 들었어요. 과연 혼자서 40일을 다닐 수 있을지
엄두가 안 났지만. 체력은 자신이 있어 용기를 냈지요.
아들과 며느리에게만 혼자 간다 말하고 2004년 3월 21일 산악회를 따라 광주 무등산
산행을 한 뒤, 해남으로 가서 시작했어요. 통일 전망대를 목표로 처음에는 한비야씨
책대로 걷다가 차차 제게 맞게 100리씩 걸어 40일 예정했던 걸 앞당겨 23일만에
끝냈어요.통일 전망대에서는 운이 좋아 군인 호위하에 민통선을 걸었어요. 철조망
너머로 바다가 넘실대는 것을 보고 통일되기 전에는 북쪽을 걸을 수 없을 것같아 바닷길
따라 해안일주를 해야겟다고 마음 먹었었지요."

결국 2006년 3월 1일,4개월 예벙으로 해안일주를 시작했다."한 번 걸어봐서 국토종단
때와 같은 불안감이나 두려움은 없었지만 이번엔 체력에 자신이 없었어요. 힘들면
도중에 돌아 오리라 생각하고, 또 주위에서 힘들면 언제든 돌아 오라는 격려에 힘입어
떠났죠."

꿈에서도 가위 눌릴 정도로 힘든 길, 기록을 세울 필요도 없고, 4개월이라는 여유도
있었지만, 아흔살 되신 친정 어머니가 자꾸 쓰러지셔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남길
까 봐 하루에 100리씩 걸어 110일 만에 끝냈단다.

길 위에서 만난 하느님

혼자 낯선 길 위에 서니 살아 온 날들 생각에 멍해지고 때론 아무 생각도 없고, 너무
힘들 땐 전신주도 세고 나무도 세어가며 걸었다. 냉방에서 아이를 낳고 메주콩만 먹고
버텼던 버거운 삶은 견딜 수 있었지만, 당시 가가운 인처거한테서 받은 인격적인
모멸감은 떨쳐 버릴 수 없어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국토 종단 때 월출산을 넘다가
계곡에 떨어진 동백꽃을 보며 내 한도 저렇게 빨갛게 각혈하듯 쏟아져 나왔으면 좋겠
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리고 이렇게 계속 미워하며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요.."

세상이 험하다지만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어서 좋은 사람, 고마운 사람을 훨씬
더 많이 만났다고 한다. 차를 세우고 사탕을 주신 분, 돈 삼만원을 주며 여비에
보내쓰라던 분, 고흥 유채꽃밭에서 만난 오 모이 뉴스 기자인 조찬현씨, 내 블로그에다
주소를 알려주고 지날때 들려서 쉬도록 숙소를 제공해 주신분...들.

"난 종교가 없지만 하느님께 늘 감사하며 살아"라며 일몰을 바라보시던 진도에서 뵌
할아버지, 어린이로부터 무학의 할머니까지 길 위에서 만난 분들이 다 스승이요,
하느님이었다.


부족함이 많은 신앙이지만

1956년,친구를 따라 다니게 된 춘천 죽림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감리교
집안인 남편과 결혼해서 성당이 없는 홍천군 철정리에 살게 되면서 하느님과 조금씩
멀어졌다. 처음엔 시오리 길을 걸어서 공소에 다녔으나 점차 시댁 식구와 개신교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신앙의 뿌리가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했음에도 남의집에 온
것같은 느낌이 들고 교회의 분위기에 섞이지 못하고 늘 낯설기만했다.

살아 갈 수록 삶은 힘겹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성당에 나가기는
커녕 하느님을 원망하며 살았는데 큰 아들이 동성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영세를 받고,
작은 아들고 형따라 영세를 받았다.

"저도 다시 성당에 나갔고, 남편도 세례를 받아 온 가족이 주님의 자녀가 되었죠.
하지만 매번 같은 죄를 짓고 같은 내용으로 고백성사를 보고, 성당 문을 나서면 원점
으로 돌아가고....아직도 부족한 게 너무 많은 신앙인이에요." 신앙이 부족해 친한 친구
에게조차 전교할 생각을 못했는데, 그래도 열심히 살긴 했는지 친한 친구들이 지금은
다 성당에 다녀 감사하다고.

이름보다 "황안나"라는 세례명으로 더 알려지게 된 것은, 인터넷 초기에 천리안 원로
통신회에 이 이름을 사용하면서부터다. 그 후 블고그나 카페는 물론 책을 낼 때도,
"황안나"라는 세례명을 쓰게 되었단다.

국토 종단이나 해안 일주 때는 가방에 미사보와 묵주를 챙겨 다녔다. 성당이 있으면
들어가 기도하거나 미사, 성체조배를 하고, 성당이 없는 곳에서는 개신교 교회에
들어가서 예배를 봤다. 걸을 때 항상 묵주를 쥐고 다니며 기도해 묵주는 늘 땀에 젖어
있었고, 잠들기 전에도 묵주 기도를 잊지 않았다. 걷기 전에도, 길을 걸을 때도, 걷고
나서도 묵주 기도.화살기도.감사기도는 항상 그녀와 함께 한 길동무였다.

자유는 용기 있는 이들의 몫

황안나 자매의 영향을 받아 58세 할머니, 60대 할아버지, 자살을 생각한 20대
청년 등 5명이 국토 종단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역할이 주저 앉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 생각한다. 걷는 것만이 아니라 뭔가 하려는 의지를 불러 일으켜 공부를
다시하게 하고,포기했던 일들을 새로 시작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가 제일 기쁘다고.
그래서 무료 강연도 마다하지 않는다.

강연에서는 주로 살아 온 삶이나 해안 일주등의 이야길 들려주는데, 해안일주때 어느
곳에서 이정표가 없어 군사 지역에 들어 간적도 있었고, 길도 많이 헤맸단다.
막다른 길에서도 찾아보면 또 다른 길이 있는 것을 보고 인생도 이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아무 희망도 없고 부채는 많아 채권자들은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남편은
집을 나가 생사를 모르고, 그래서 자살까지 생각했던 삶. "하지만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제가 살아 온 길이 버겁고 힘겨웠지만 그때 그때마다 하느님의 손길이 있었죠.
단지 장애물이 있어 빙도느라 고생을 하고 시간이 더 걸렸을 뿐...행복은 각자 누리는
이의 몫이죠."

걸어 다니면서부터 아파트가 싫어져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해 텃밭 가꾸며 순한 개를
키우고 싶다는 그녀. 앞으로의 바램이라면 빨리 통일이 되어 북녘땅도 일주하고, 도보
성지 순례도 하는 것이아고.

하느님이 주신 너무나 소중한 땅, 길만 보면 걷고 싶어진다는 "길 중독자" 그녀가 이웃과
주부들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떠나는 저를 부러워하지만, 살마들이
못하는 것이죠. 자유는 용기있는 이들의 몫이라는 것을 명심해요"라고.




황경화(안나)

1940, 개성 출생
1998년 명예 퇴임 (교사 생활 40년)

2004년 국토 종단 (해남 땅끝마을~고성 통일 전망대까지)
2005년 "내 나이가 어때서"책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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